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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화두의 참구

(1) 참구방법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친다. 이는 의심이 투철하여 은산철벽처럼 꽉 막혀, 와도 오는 것을 모르고 가도 가는 줄 모르며 오직 의심으로만 꽉 뭉쳐진 상태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의정을 일으켜 화두를 드는 방법은 무엇인가? 전제(전체 내용)와 단제(무 또는 이뭣고)를 섞어 새기다가 조금 익숙해지면 단제속에 전제가 다 들어가게 되므로 저절로 단제가 되어버린다. 

 이뭣고 화두를 예를 들면
“밥먹고 옷입고 말하고 보고 듣는 이놈, 언제 어디서나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 이놈이 무엇인고?”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한물건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가?”
“부모 미생전 나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고?”
“이송장을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여러 가지중 하나만 택해 의심을 지어간다. 전제를 통해 화두를 들때는 한전제만 택해 간절히 들어야 한다. 
 단제만 들면서 이뭣고? 할때는 ‘이’를 약간 길게 하면서 마음속으로 ‘이-’하는 이놈이 뭣꼬 하면서 의심을 일으키든지, 
 아니면 조금 막연하지만 ‘이-뭣-고?’하면서 의심을 지어가는 것도 요령이다.
 의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의심이 몰록 터져 나와야 망념이 달라붙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생각 한생각 단속하여 화두를 들며 역력하게 깨어있게 되면 망념이 정지되는 순간이 거듭거듭 자주 오게된다. 이런 상태가 장벽처럼 굳건해져 어떤 경우라도 이뭣고 화두가 끊기지 않아 오고간다는 분별이 단절되는 힘을 얻게 되면 이것을 일걸어 의심덩어리, 곧 의단(疑團)이된다. 이 의단이 홀로 밝게 드러나게 되면 그만둘래야 그만둘수 없는 한 덩어리 공부가 되어 이것을 타파하면 확철대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화두가 현전하는 시기에도 조금만 방심하면 또다시 망념에 휩싸이니, 철두철미한 자기와 투쟁을 열과성을 다해 밀도있게 몰아붙여가야 한다. 참으로 목숨바쳐 한생각 한생각 단속하는 데에 공부의 어려움이 있으니,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철저히 믿고 앞뒤 돌아보지 않고, 과거 선지식도 다 나와 같은 상태에서 출발했으니 나도 열심히만 하면 틀림없이 확철대오할수 있다는 철저한 믿음으로 정진해야 한다.
화두 참구법에 대해 태고보우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몸과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느끼지도 못하고 마음의 눈으로 화두를 한곳에 거두어들이고 단지 이와같이 또렷또렷하면서도 분명히 드러나 있고, 분명히 드러나 있으면서도 또렷또렷하게 세밀하고 빈틈없이 참구하라.”

(2)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
 만약 진실로 참선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세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 대신심이니, 이는 수미산을 의지한 것과 같이 흔들림이 없음이다. 둘째, 대분심이니, 마치 부모죽인 원수 만나 당장 한칼에 두동강을 내려는 것과 같다. 셋째 대의정이니, 어두운 곳에서 한가지 중요한 일을 하고 곧 드러내고자 하나 드러나지 않은때와 같이 하는 것이다.온종일 이 세가지 요소를 갖출수 있다면 반드시 하루가 다하기 전에 공을 이루는 것이 독속에 있는 자라가 달아날까 두려워하지 않겠지만, 만일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마치 다리부러진 솥이 마침내 못쓰는 그릇이 되는 것과 같다.
 
大信心
 나옹화상 : 일대사를 반드시 깨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큰 믿음을 일으키고 견고한 뜻을 세워 이전에 배웟거나 이해한 부처와 법에 대한 견해를 한바탕 빗자루질로 바다속에 쓸어 없애고 더 이상 들먹거리지 말라. 
 자기본성은 일찍이 때묻지 않고 맑고 밝은 모습으로 본래부터 원만구족한 진리의 주인공이라는 확신이 수행의 기본자세이다. 마음이 부처라는 확신으로 참선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정진하는 것이 대신심이다. 자신은 진리의 주체이므로 끝없는 지혜와 용기와 덕성이 충만해 있으며, 어떤 고난에서도 희망을 불태우는 불굴의 용기를 뿜어낼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중생과 세계를 나와 더불어 하나라 생각하는 큰믿음을 내어 수미산처럼 움직일줄 모르고 오직 불조의 정진력을 본받아 나아가야한다. 하지만 진정한 대신심은 견성을 해야 대신심이라 할 수 있다. 

大憤心 오늘도 헛되이 깨침없이 보내는 것을 아타까워 하면서 생사를 뛰어넘으려는 강력한 마음이며, 바른 선지식 만나고도 허송세월한 것을 분하게 여겨 불퇴전의 마음으로 정진하는 것이 대분심이다. 과거 조사들에 비해 나는 무엇이 부족하길래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는가? 그러면서 스스로 자만하고 어리석기 끝이 없어 부끄러움도 모르니 참으로 딱하고 슬픈 노릇아닌가? 영원한 생명이 나자신에게 있어 생생하게 고동치는데도 나는 이를 보지 못하고 미혹하여 목전의 이익과 달콤한 경계에 탐착하여 헐떡거리며 살고 있는가? 나의 이익을 위해 나와 남을 가르고 시비분별을 일삼으며 상처를 주고받으며 본래면목을 잊고 착각속에서 어리석게 살아온것이다. 이제 다행이 선법을 만났으니, 어두웠던 과거생과 현재 무지를 끊는 취모검이며,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라는 자책감으로 치밀어 오르는 대분심이 울컥울컥 솟아나야 한다. 몸이 하자는 대로 욕망의 굴레를 따라가지 않고, 확철대오 하겠다는 마음이 끊임없이 솟구쳐 올라야 한다. 수행자는 이같은 분심으로 억겁의 무명을 꿰뚫고 온간 분별의 함정을 단번에 벗어나 대자유의 평원으로 가게된다.

大疑心
 화두하나만 생각하고, 화두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망상이 일어나도 그대로 내버려 두고 화두만 바르게 참구해 나가는 것이 대의정이며, 이는 화두의 근본 생명이다. 크게 의심해야 크게 깨달으며, 의심하는 나가 사라진 자리에서 폭발하는 근원적인 의심이 大疑이다. 이 대의가 기연을 만나 마침내 타파될때, 수행자는 한바탕 크게 죽어 하늘과 땅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화두는 생각의 길이 끊어진 본래면목이기에 분별심으로는 알수 없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가히 잡아볼 수 없고 형용할수 없으니, 수행자가 전심전력으로 정면승부할 수밖에 없다. 불조께서 내게 있는 본래물건을 눈앞에서 밝게 보여주고 있는데 나는 어찌하여 보지 못한다는 말인가? 왜 어째서 모르는가? 이렇게 큰 의심이 솟아나면 온몸 온 생각이 화두덩어리로 바뀌고 화두로 눕고 화두로 잠들게 되면 “필경 이것이 무슨 도리냐?”는 일념이 끊이지 않게 되어 맑고 고요하고 또렷한 의정이 드러난다. 즉, 화두에 간절히 의심을 지어가다 보면 어느순간 자연스레 의심이 끊어지지 않는 이것을 의정이라 하며, 의식적으로 애써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감정처럼 지속된다. 의정없는 공부란 있을수 없다.
 의정이 계속되면 한 덩어리가 되어 의단만 홀로 드러나게 된다.(疑團獨露) 이렇게 되면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어 서로 나누어지지 않고 한몸을 이룬다. 의심덩어리가 불덩어리가 되어 다른것이 끼어들 틈이 없는 상태가 된다.(打成一片) 이렇게 되면 무심코 헤아리는 습관이나 계산하고 비교하는 일을 떠나 천차만별의 사물과 융합하여 하나를 이루게 된다. 주객, 피차, 재고 따지는 모든 차별상을 떠나 단순하고 순수해진다. 나아가 화두와 하나가 되었기에 화두를 들고서도 밥먹고 일하고 이야기 나눌수 있게된다.
 또 화두가 잘들릴때, 환희심을 내면, 그 환희심이 마음속으로 파고들어와 화두를 놓치게 되므로 조심해야 한다. 또한 의정이 순일하지 않고 뚝 끊어지게 되면 아무런 의식도 없는 無記에 떨어지니 더욱 경계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화두가 타성일편된 상태에서 은산철벽을 투과하여 확철대오 해야한다. 의정이 순숙해지면 은산철벽 은으로 만든 두께를 알 수 없는 철벽으로 앞뒤좌우사방이 막혀서 한발짝 나아가거나 물러날 수 없음을 말함
처럼 사유의 모든 출로가 차단된다. 이와 같은 은산철벽을 뚫고 나가야만 비로소 밝은 소식이 온다.

(3) 參究 vs 觀法
 화두를 참구하면 의정을 일으키고, 화두를 관하면 정신을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화두를 관하게 되면 화두와 내가 나뉘어 화두를 대상화하게 되는데, 이는 화두를 따라가며 관찰하는 것이며, 상대적인 입장을 떠날 수 없다. 물론 관법을 통해 들뜬 마음을 제거하여 명료한 경지에 들수 있지만, 철저한 화두삼매에 들수는 없다. 화두 참구는 주관객관 나와 화두 이분법적 경계를 뛰어넘어 혼연일체가 되는 것으로 관법과는 확연히 다르다.
 육조 혜능대사는 좌선시 看心과 看淨은 잘못이라고 했다. 요컨대 돈오견성에 있어 마음을 본다든지 깨끗함을 보는 것조차 장애된다는 것이다. 깨끗한 마음이라는 망상을 다시 일으킴을 경계한다. 마치 눈동자가 눈동자를 볼수 없는 이치와 같아서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찾으면 마음을 찾을 수 없을뿐더러, 그 찾는 마음자체가 망상이다. 간화선 수행에서 화두를 대상화 하여 관하면 안되거, 대상과 하나가 될수 있도록 철저한 의심을 통해 화두삼매에 들고 은산철벽을 투과해서 확철대오 해야 한다.

(4) 화두참구가 안될때
 정봉무무스님은 1. 게으름 2. 대상을 잊어버림 3. 혼침과 도거 (계율을 지니고, 세속심, 탐욕을 경계하면 원인을 줄여갈수 있다.) 4. 혼침과 도거에 대한 대치법을 쓰지 않는것 (혼침이 일어날 때 불법에 환희심을 일으키는 생각을 일으키고 부처님 광명을 사유한다. 도거가 왔을때는 죽음과 무상에 대해 사유한다. 그래도 잘 않될때는 경행하거나 찬물로 세수한다.) 5. 혼침과 도거가 없을때 정지견을 내지 않는 것, 이 다섯가지를 일념삼매가 되지 않는 원인으로 꼽는다.
 화두의 핵심인 의심이 잘 나지 않을때는 거듭거듭 전제를 들추며 끊임없이 화두를 지어갈 수밖에 다른 묘책이 없다. 화두를 참구하는 간절하고 지극한 마음은 자신의 온 생명을 걸때 생긴다. 간절하게 화두를 들다보면 어느날 문득 진정한 의정이 일어나 화두가 역력히 현전하게 되고 마음은 이내 고요해지고 번뇌망상 또한 저절로 사라진다.
 화두의 생명은 의정이 일어나는데 있다. 안되는 화두라도 끈질김과 간절함으로 들어가면 어느날 문득 진의가 돈발한다. 또한 화두 의심이 지속되지 않아 화두가 쉽게 안들리는 경우는 속도조절이 필요하다. 몸과 마음이 너무 경직되지 않도록 여유를 갖고 참구해야 한다. 화두가 안들리는 것도 공부의 과정으로 여기고 다른 방편을 쓰지 말고 꾸준히 놓치지만 말고 실낱만큼의 의심이라도 이어지게끔 마음의 긴장을 조절해 가는 것이 요령이다. 그렇게 애쓰다 보면 줄기찬 의정이 일어날 때가 있을 것이다. 다른 묘책이 없다. 망상이 점차 없어지면 의정은 저절로 일어나게 된다.

(5) 死句와 活句
 이렇게해도 안되고 저렇게 해도 안되며, 그렇다고 침묵으로 통할수도 없는 마음의 길이 끊어진 이 활구는 철학적 모색이 불가능하다. 활구는 지금 이 자리에서 펄펄 살아 움직이는 본래면목의 언어적 존재방식이다. 반면 사구는 말의 그림자가 담겨있고 분별의 기미가 있다. 사유의 성찰이 조금이라도 스미면 사구로 전락한다. 활구를 참구하여 바로 깨치면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인 경절문(徑截門)으로 통한다. 결국 의심없는 화두나 의심이 제대로 걸리지 않는 화두는 사구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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